남북조 시대 (베트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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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남북조 시대는 16세기 베트남에서 후 레 왕조가 쇠퇴하고 막 왕조가 등장하면서 시작되었다. 막당중은 레 왕조의 혼란을 틈타 권력을 장악하고 1527년 스스로 황제에 올라 막 왕조를 건국했다. 이후 레 왕조의 후예를 받든 응우옌 낌이 세력을 키워 남북으로 분열되었으며, 북조(막 왕조)는 하노이를 중심으로, 남조(중흥 레 왕조)는 타인호아를 중심으로 대립했다. 1592년 남조가 북조를 격파하고 통일했지만, 찐씨와 응우옌씨의 불화로 찐-응우옌 분쟁이라는 또 다른 분열 시대를 겪었다.
16세기 초, 후 레 왕조는 여러 명의 허수아비 황제 아래에서 쇠퇴하였다. 왕권이 약화되자 귀족 가문들이 권력을 차지하려 했다. 1527년, 막당중은 레꿍호앙을 폐위시키고 막 왕조를 건국하였다.
응우옌 낌이 독살된 후, 그의 사위 찡 끼엠은 군사를 타잉호아로 물리고 투이 응우옌현 반 라이에 궁전을 지어 막 왕조에 저항했다. 이때부터 베트남은 타잉호아 이남의 남조와 선남 이북의 북조로 나뉘어 대치하는 남북조 시대를 맞게 되었다.[1]
2. 후 레 왕조의 쇠퇴와 막 왕조의 등장
이 시기 동경(하노이)을 중심으로 북조(막 왕조)가, 타인호아를 중심으로 응우옌 낌이 레 왕조의 후예를 받들어 지원한 남조(중흥 레 왕조)가 홍강 남쪽에 존재했다.
두 왕조는 1592년 남조가 북조를 격파하고 동경을 탈환할 때까지 60년 가까이 대립했다. 동경 탈환으로 국가가 재통일된 것처럼 보였지만, 막씨는 중국 (명 왕조와 청 왕조)의 보호 아래 1677년까지 까오방에서 자치를 이어갔다. 또한 남조 측도 황제를 받들던 찐씨 일족과 응우옌씨 일족의 불화로 분열되어, 동경의 찐씨와 꽝남의 응우옌씨에 의한 긴 분열 시대(찐응우옌 분쟁)를 겪게 되었다. 중국 일부 역사서 등에서는 남북조 시대와 찐-응우옌 분쟁을 합쳐 '''베트남 남북조 시대'''라고 부르기도 한다.[1]
2. 1. 막당중의 집권
후 레 왕조는 16세기 초부터 쇠퇴하기 시작했다. 1497년부터 1527년까지 6명의 통치자가 바뀌는 동안 레 왕조는 북부 지역에 대한 통제력을 유지할 수 없었고, 새롭게 얻은 남쪽 영토는 더욱 통제하기 어려웠다. 왕권이 약해지면서 귀족 가문들이 권력을 차지하려는 상황이 벌어졌다. 1522년 레 치에우 통이 찐씨, 응우옌씨와 함께 남쪽으로 피신하자, 막 당 중은 황제의 남동생 레쑤언을 레 꿍 호앙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황제로 내세웠다. 그러나 레 꿍 호앙은 실제 권력이 없었다. 1527년, 막당중은 자신의 군대를 시켜 레찌에우통을 살해하고, 레 꿍 호앙마저 죽임으로써 허수아비 황제라는 상황을 끝냈다. 10년 동안 레 왕조를 사실상 통제해 온 학자 출신 관료 막 당 중은 1527년 스스로 베트남의 황제임을 선포하고 막 왕조를 세웠다.[1]
3. 남북조 시대의 전개
이 시대에는 레 왕조를 찬탈한 막 당 중이 세운 북조(막 왕조)가 동경(하노이)을 중심으로, 레 왕조의 후예를 받든 응우옌 낌이 지원한 남조(중흥 레 왕조)가 타인호아를 중심으로 홍강 남쪽에 존재했다.
두 왕조는 1592년 남조가 북조를 격파하고 동경을 탈환할 때까지 약 60년간 대립했다. 동경 탈환으로 국가가 재통일된 것처럼 보였지만, 막씨는 중국(명나라와 청나라)의 보호 아래 1677년까지 까오방에서 자치를 이어갔다. 또한 남조 측도 황제를 받들던 찐씨 일족과 응우옌씨 일족의 불화로 분열되어, 동경의 찐씨와 꽝남의 응우옌씨에 의한 긴 분열 시대(찐-응우옌 분쟁)를 겪게 되었다. 중국 일부 역사서 등에서는 남북조 시대와 찐-응우옌 분쟁을 합쳐 '''베트남 남북조 시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3. 1. 응우옌 낌의 부흥 운동
1531년 응우옌 낌(Nguyen Kim)은 응우옌 호앙 주의 아들로 타잉호아에서 우위전전장군안청후(右衛殿前將軍安淸候)를 지내던 중, 막 태조의 찬탈 소식을 듣고 라오스로 피신하였다가 라오스 왕의 도움을 받아 섬 쩌우에서 세력을 규합하였다. 1533년 후 레 소종의 막내아들 후 레 장종을 찾아내어 즉위케 함으로써 후 레 왕조의 명맥을 잇는 데 성공하였다. 이로써 그의 부흥 운동은 명실상부한 명분을 얻게 되었고, 이를 기반으로 세력을 확대해 나갔다. 이듬해에는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막 태조의 제위 찬탈을 알리고 토벌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응우옌 낌은 썸 쩌우에서 8년간 세력을 키운 다음 응에 안으로 진격하였다. 1543년 서도를 회복하는 데 이어 2년 후에는 선 남과 옌 모 현으로 진격하였다. 그러나 투항했던 즈엉 쩝 녙(Duong Chap Nhat)에 의하여 응우옌 낌이 독살당하자 병권은 사위였던 찡 끼엠(Trinh Kiem)에게 넘어갔다.
3. 2. 남조와 북조의 대립
1547년 막 헌종이 사망하고 막 선종이 즉위했으며, 1562년에는 막머우헙이 제위에 올랐으나, 북조는 이때부터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1548년 레 장종의 사망 이후, 후 레 왕조의 모든 실권을 쥐고 있던 정검(Trịnh Kiểm)은 후 레 중종을 태자로 삼아 제위에 오르게 하였다. 남조의 궁전은 안 쯔엉(An truong)으로 옮겨졌다. 즉위 8년 만에 레 중종이 후사없이 사망하자, 찡 끼엠은 후 레 태조의 형 레 쯔의 현손인 후 레 영종으로 제위를 잇게 했다. [1]
후 레 왕조의 복흥 운동이 성공하여 국가가 남북으로 나뉜 이후, 남조와 북조는 통일을 목표로 치열한 전쟁에 돌입했다. 남조에서는 응우옌 낌 사후 모든 권한을 쥐게 된 찡 끼엠이, 북조에서는 막 선종의 숙부인 막경전(Mạc Kính Điển)이 전쟁을 이끌었다. 양측은 선 남과 타잉 호아에서 각각 여섯 차례와 열 차례에 걸쳐 남진과 북진을 거듭했으나, 어느 쪽도 승리하지 못했다. [1]
1570년 찡 끼엠이 사망하자 장남 찡 꼬이(Trinh Coi)가 전권을 이었으나, 주색에 빠져 불만을 품은 장수들과 찡 꼬이의 동생 정송(Trịnh Tùng)은 형을 제거하고자 레 영종을 호위하여 반 라이로 도망하였다. 북조는 이 틈을 타 타잉 호아로 남진하여 찡 꼬이를 사로잡았고, 찡 뚱은 보 베로 옮겨 북조에 대항하였다. 이후 북조군이 식량이 부족하여 북으로 철수하자 남조의 전권은 다시 찡 뚱에게 넘어갔다. 레 영종은 찡 뚱을 장국공(長國公)에 봉하였다. [1]
1583년 찡 뚱은 선 남에 진군하여 옌 모현과 옌 카잉현을 유린하고 많은 식량을 빼앗아 철수하였다. 이후 매년 선 남에 진출하여 북조를 수세에 빠뜨렸다. 1591년 찡 뚱은 5만의 천자군을 이끌고 북진하였다. 북조의 막 영조는 10만 병사를 동원하여 대항하였다. 탕 롱성 가까이에 접근한 남조는 구정을 맞아 잠시 정전에 들어갔다. 막 영조는 전세가 불리하다고 판단하여 홍강을 건너 토 코이사로 후퇴하였다. 찡 뚱은 탕 롱성을 탈환하였으나, 더 이상 공격하지 않고 타잉 호아로 돌아왔다. [1]
4. 남조의 통일과 막 왕조 잔존 세력
1592년 막 영조가 반 코아이에게 붙잡혀 살해되면서 후 레 왕조의 복흥 운동은 성공하였고, 베트남은 다시 통일되었다.[1]
4. 1. 탕롱성 함락
막 왕조의 막 영조는 탕롱성으로 돌아왔지만, 정사를 돌보지 않고 주색에 빠져 있었다. 그는 브이 반 쿠에의 아내 응우옌씨에게 반해 그녀를 차지하고자 브이 반 쿠에를 죽이려 했다. 이를 알아챈 브이 반 쿠에는 아내와 함께 찡 뚱에게 투항했다. 찡 뚱은 즉시 군사를 일으켜 티엔 파이강에서 막 왕조의 병선 70척을 빼앗고 쩐 바익 니엔을 사로잡았다. 찡 뚱이 탕롱성에 가까이 오자 막 영조는 낌 타잉으로 달아났다. 응우옌 텉 리, 브이 반 쿠에 등은 낌 타잉으로 진격하여 많은 재물을 빼앗고 막 영조의 모친을 사로잡았다.[1]위협을 느낀 막 영조는 아들 막 또안에게 황제 자리를 물려주고 직접 군사를 이끌고 남조에 저항했다. 그러나 그는 패배하여 프엉 년(Phuong)현의 한 절에 숨어 있다가 반 코아이에게 붙잡혀 살해되었다.(1592년) 이로써 후 레 왕조의 복흥 운동은 성공하였고, 베트남은 다시 통일된 국가를 이루게 되었다.[1]
5. 남조의 분열: 찐응우옌 분쟁
남조는 북조를 격파하고 동경(하노이)을 탈환하여 국가를 재통일하는 듯했으나, 황제를 받들던 찐씨 일족과 응우옌씨 일족의 불화로 다시 분열되었다. 동경의 찐씨와 꽝남의 응우옌씨는 오랜 기간 분열되어 대립했는데, 이를 찐응우옌 분쟁이라고 한다. 중국 일부 역사서 등에서는 남북조 시대와 찐응우옌 분쟁을 합쳐 '베트남 남북조 시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6. 군주 목록
16세기 초 후 레 왕조가 쇠퇴하면서 막당중이 막 왕조를 건국하여 베트남은 남북조 시대로 접어들었다. 남쪽에서는 레 장종이 레 왕조 부흥 운동을 시작하여, 이후 남북조는 통일을 위한 전쟁을 벌였다.[1]
6. 1. 막 왕조 (북조)
대수 | 묘호 | 휘 | 재위 기간 |
---|---|---|---|
1 | 막 태조 | 막당용 | 1527년 ~ 1529년 |
2 | 막 태종 | 막당조아인 | 1529년 ~ 1540년 |
3 | 막 헌종 | 막푹하이 | 1540년 ~ 1546년 |
4 | 막 선종 | 막푹응우옌 | 1546년 ~ 1561년 |
5 | 막머우헙 | 막머우헙 | 1561년 ~ 1592년 |
- | 막낀디엔 | 1570년부터 군사 담당, 1580년 사망 | |
- | 막돈니으엉 | 1570년부터 내정 담당, 1581년부터 군정과 내정 동시 담당 | |
6 | 막또안 | 막또안 | 1592년 |
16세기 초 후 레 왕조는 쇠퇴하기 시작했다. 1497년에서 1527년 사이에 6명의 통치자 아래에서 존속했던 레 왕조는 결국 북부 지역에 대한 통제력을 유지할 수 없었고, 남쪽의 새로운 영토는 더욱 통제할 수 없었다. 왕권의 약화는 귀족 가문들이 채우고 싶어하는 권력 공백을 만들었다. 1522년 레 치에우 통이 찐씨와 응우옌씨와 함께 남쪽으로 도망친 직후, 막 당 중은 황제의 남동생 레 쑤언을 레 꿍 호앙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황제로 선포했다. 실제로는 새로운 황제에게는 아무런 권력이 없었다. 막의 군대가 그의 형 레 치에우 통을 살해한 지 3년 후, 막 당 중은 1527년 레 꿍 호앙을 죽임으로써 레 꿍 호앙이 실제로 통치한다는 허구를 끝냈다. 10년 동안 레 왕조를 효과적으로 통제했던 학자 출신 관료인 막 당 중은 1527년 자신을 베트남의 새로운 황제로 선포하고 막 왕조를 건국했다.
6. 2. 중흥 레 왕조 (남조)
1548년 레 장종이 사망한 후, 당시 후 레 왕조의 모든 실권을 쥐고 있던 찡 끼엠은 레 중종을 태자로 삼아 제위에 오르게 하였다. 이때 남조의 궁전은 지금의 토쑤언(Tho xuan)현에 속하는 안쯔엉(An truong)으로 옮겨졌다. 즉위 8년 만에 레 중종이 후사 없이 사망하자, 찡 끼엠은 레 태조의 형 레 쯔의 현손으로 동선(Dong son)현 보베(Bo ve)사에 거하고 있던 레 영종으로 제위를 잇게 했다. 후 레 왕조의 복흥 운동이 성공하여 국가가 남북으로 나뉜 이후부터 양측은 통일을 목표로 치열한 전쟁에 돌입했다. 남조에서는 응우옌 낌 사후 모든 권한을 쥐게 된 찡 끼엠이 전쟁을 이끌어갔다.[1]1570년 찡 끼엠이 사망하자 전권은 장남 찡 꼬이(Trinh Coi)가 이었으나, 그가 늘 주색에 빠져 불만을 품은 장수들과 찡 꼬이의 동생 찡 뚱(Trinh Tung)은 형을 제거하고자 레 영종을 호위하여 반 라이로 도망하였다. 이후 북조군이 식량이 부족하여 북으로 철수하자 남조의 전권은 다시 찡 뚱에게 넘어갔다. 레 영종은 북조를 물리친 데 대한 포상으로 찡 뚱을 장국공(長國公)에 봉하였다.[1]
1583년 찡 뚱은 선남에 진군하여 옌모현과 옌카잉현을 유린하고 많은 식량을 빼앗아 철수하였다. 이후 매년 그는 선남에 진출하여 북조를 수세에 빠뜨렸다. 1591년 찡 뚱은 찡 반 하이, 태군공 응우옌 텉 리로 해구와 요해처의 방위를 강화하도록 한 후에 천자군 5만을 5열로 나누어 북진하였다. 탕롱성 가까이에 접근한 남조는 구정을 맞아 잠시 정전에 들어갔다. 찡 뚱은 곧바로 탕롱성을 탈환하였으나, 막 영조에 대한 더 이상의 공격 없이 타잉호아로 돌아왔다. 그의 타잉호아로의 귀환에 대한 이유는 역사적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1]
중흥 레 왕조의 역대 왕은 다음과 같다.[1]
대수 | 휘 | 재위 기간 |
---|---|---|
1 | 레 주이 닌(Lê Duy Ninh) | 장종 (1533년 ~ 1548년) |
2 | 레 주이 후옌(Lê Duy Huyên) | 중종 (1548년 ~ 1556년) |
3 | 레 주이 방(Lê Duy Bang) | 영종 (1556년 ~ 1573년) |
4 | 레 주이 담(Lê Duy Đàm) | 세종 (1573년 ~ 159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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